성서는 성서 그 자체만으로 읽혀서는 안된다. 기독교는 그 외부와 만남을 통해, 그리스 철학, 실존주의, 맑시즘 등 과의 만남을 통해 그 보편성을 넓혀왔다. 그러한 만남이 없이 성서만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그것은 너무 조잡하다. 성서와 계시 만으로 기독교는 결코 세계 종교가 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 길희성, 2011.02.20 새길교회 청년들과의 대화 중에서

외부와의 만남을 통해 기독교의 보편성을 넓힐 수 있다고 믿는 그가 보살예수라는 책을 썻다면 그 목적은 제법 분명해 보인다. 기독교가 불교라는 외부와의 만남을 통해서, 부처, 또는 보살과의 만남을 통해서 기독교의 보편의 영역을 더욱 확보하는 일에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 이 말은 길희성 교수님의 생각을 심히 왜곡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보편성을 넓히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와 불교가 가지는 근본적 메시지의 보편성을 넓히는 것이다. 나아가 종교 다원주의자로서의 그는 기독교와 불교가 서로 각자 올라가는 산의 정상이 동일함을 자신과 우리에게 보이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와 기독교는 굉장히 다르다. 태어난 역사적 배경이 다르며 중심 사상도 달라도 너무 다르다. 불교는 만물의 근본의 원인인 일자(一字)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무신론 종교라 부를 수 있다면, 기독교는 유일신 종교의 대표주자이다. 기독교가 개인의 영혼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다면, 곧 실체론을 주장한다면 불교는 철저히 비실체론이며 유명론을 말한다. 기독는 하나님 나라와 유일신의 존재를 말함으로써 저기 피안(彼岸)의 세계를 항시 바라보지만 불교는 피안과 형이상학에는 도무지 관심이없다. 이렇게 명백히 드러나는 차이를 극복할만한 같음이 두 종교에, 예수와 부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일까? 보살예수, 이 책의 부제는 기독교와 불교의 창조적 만남이지만 자칫하면 어색한 만남으로 끝날 수 있는 많은 난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길희성교수의 이 책은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불교에 대해 자세하고도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이 불교란 기독교와 같이 하늘에서 벼락으로 떨어진 계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부처와 그의 제자들이 치열한 현실과의 싸움을 통해서 얻은 것이기에 기독교보다 더욱 더 명료하고 논리적이다. 그리고 그 싸움이란 철학이 세상과 싸우는 방식과 다르지 않아보인다. 곧 현실의 분명한 문제의식, 그리고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개념과 이론의 생성의 반복에 다름 아닌 것이다.

불교와 불교의 창시자 싯타르타의 목표는 매우 간단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생기는 고통을 없애는것이 바로 그의 목표이고 불교의 목표이다. 싯타르타는 이 고통의 원인이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이 "있지도 않은 것"이란 무엇인가? 바로 세상의 모든 것에 비 의존적인 "자아"의 존재이다. 당시 인도의 사상은 철저한 실체론이라 불릴 수 있었다. "카파 우파니샤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아는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다. 어디에서 오거나 무엇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태어나지도 않고 영원하며, 원초적이다. 육신이 살해될 때도 이것은 살해되지도 않는다.

불교는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이 사상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육신이 살해될 때도 살해되지 않는 영원하며 원초적인 자아의 존재에 대해 부정한다. 또한 이에 대한 앎으로서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벗음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실체론에 대항하기 위해 탄생한 이론이 바로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이다. 연기론이란 '나'란 결코 혼자 존재할 수 밖에 없고 '나'란 다른 것에 의존재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한다.

불교는 모든 것이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타자"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그럼으로 자신의 존재가 사실 없음을 아는 것, 이 앎을 통해 자신을 변형하고 모든 집착을 끊고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극복하는 것을 열반이라 하고 이 열반에 다다른 자를 아라한(阿羅漢)이라 칭했다. 곧 초기 불교의 목표는 개개인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열반에 대한 개개인의 목표가 강조되자 문제가 생겼다. 열반이란 목표 내에서 "개인"으로서의 깨달음과 해탈만을 중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열반이라는 목표가 오히려 사람을 더욱 "개인"으로 몰고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초기 불교는 그 다음 불교, 곧 대승 불교에게 "작은 수레"라는 놀림을 받게 되고 안타깝게도 이것이 곧 이름이 되어 후대 사람들에게 소승불교라 불리게 되었다.

이제 대승불교의 문제제기가 시작되었다. 개개인의 집착을 끊으려 정진하고 수행하는 행위가 중생과 승려를 더욱 구분하게 되고 이것은 부처가 처음 가르쳤던 가르침과 맞지 않는 다는 것이 그들의 문제제기이다.

살아 있는 다른 모든 생명체가 고통 받고 있는데 행복이 가능 한 것일까? 온 세상이 고통으로 울부짖는데당신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이제 불교의 목표가 개개인의 해탈과 열반에서 중생 일반에 대한 구제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다시한번 이론과 개념이 정립되어야 한다. 대승불교의 이론을 정립했다 할 수 있는 나가르주나는 불교의 연기론을 끝까지 확장해 모든 일체의 것은 공(空)하다라고 말했다. 바로 공(空) 사상이 등장한 것이다. 이 공하다 라는 선언은 '무엇이 없다'라는 것이 아니다. 공은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도 할 수 없고 비존재한다고 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비유비무(非有非無) 인 것이고 생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인 것이다. 이렇게 나가르주나가 설파한 이유는 일체의 모든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이원론을 피하려한 것이다. 곧 생사와 열반을 구분하는 태도를 벗어나 (생사와 열반이 하나다, 번뇌가 곧 보리이며 보리가 곧 번뇌이다.) 사물을 바로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것에 목표를 두는 것이었다.

이런 공사상을 바탕으로 모든 집착, 심지어 열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것으로부터 불교의 목표가 아라한에서 '보살'로 이동하게 되었다. "보살"이란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보살이란 개념이 무엇이냐면(실로 놀랍기 그지 없는데) 보살이란 모든 생명체가 열반에 이를 때 까지 자신의 열반을 뒤로 미루는 사람을 의미한다. 보통의 중생이 업과 집착에 의해 환생한다면 보살은 자신의 '원'에 의해 스스로 윤회의 수레바퀴로 뛰어드는 것이다.(놀랍지 아니한가? 상상력이 이 정도는 되어야!) 또한 집착과 업에 의해 사람이 환생한다면 보살은 중생에 대한 사랑으로 중생에 대한 집착이 남아 윤회하는 자라고도 볼 수 있겠다. 달라이라마는 이 보살의 하나의 예인 것이다. 이 보살이 되려면 자비심과 지혜가 동시에 필요하다. 지혜만 있으면 자신의 해탈만을 추구하려 하며, 자비만 있으면 번뇌와 집착을 낳아 고통에 빠질 뿐이다.

저자 길희성교수는 이러한 보살의 특징으로 자유로움을 언급했다. 보살은 생사의 세계로부터 자유로우며 보살은 생사의 세계로 부터 자유로울 뿐 아니라 열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또한 보살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롭다. 길희성 교수는 예수도 이 보살의 특징에 견주는데 과연 예수 또한 보살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고 보살의 행동방식으로 예수 또한 살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충분히 우리가 인정할 만한 사실이다. 보살과 예수 모두 자비를 말했다. 사랑을 말했다. 생사와 열반을 구분하지 않고 만인의 고통을 극복하려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 놓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는 길희성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충분히 말해지지 않는다. 그는 한발짝 더 걸었다. 보살과 예수의 행동의 같음을 말하는 것을 넘어서서 보살이 보살되게 하는 깨달음과 예수가 예수되게 하는 그것이 동일하다라고 말한 것이다. 보자, 보살이 보살되게 하는 것은 공, 진여(眞如)로써의 공의 깨달음이다. 예수가 예수되게 하는 것은 아빠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이다. 결국 길희성 교수는 이 진여로써의 공의 깨달음과 아빠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이 결국 같음을 말한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 길희성 교수는 기독교인이 인정하는 인격적신으로서의 하나님을 반드시 넘어서야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공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사유한다.

불교의 공관은 하느님을 대상적 존재로 취급하는 조잡하고 저급한 신관을 가차 없이 파괴하며, 이것은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인들 스스로가 환영해야 할 일입니다. 무한한 하느님, 절대유로서의 하느님은 결코 유나 사물, 혹은 유한한 인격체 같은 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뛰어나고 예외적인 존재자라 할 지라도 하느님을 하나의 존재자로 파악하는 한,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무한한 실재를 하나의 유한한 존재로 격하하는 것입니다. 공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유한한 것을 무한한것으로 숭배하는 우상숭배를 방지해줍니다.

그는 기독교인이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격적 하나님으로서의 신관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하며 한국 기독교의 보편적인 신관을 비판한다. 만물의 일자로서의 하나님에 인간의 모습을 너무 투영해 기독교의 신관을 유치하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아가 기독교인으로서의 그는 이 인격적 신을 말하는 신관을 넘어서 나아가 공관 이후의 신관에 대해서 논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느님을 만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면서도 세계와 떨어져 있기보다는 만물에 내재하면서 만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실재로 생각해야 합니다. 구체적 사물의 유한성을 초월하면서도 다양한 사물에 즉해서 함께 움직이는 역동적 신관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길희성 교수는 공과 사랑의 하느님이 별개의 실재가 아니라 동일한 실재가 달리 이해되는 것이라 말한다. 나가르주나는 이런 말을 했다.

공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성립할 수 있다. 만일 공의 이치가 없다면 어떤 존재도 성립하지 않는다.

길희성 교수는 공의 이치로서의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공이 사랑의 존재론적 의미라면 사랑은 공의 인격적 언어라 말한다. 공이 곧 하느님의 사랑이며 로고스라고 그는 말한다. 또한 그 공의 이치가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사랑의 원리가 이 우주의 궁극적 힘이며 존재론적 원리라 말한다. 예수와 보살은 그러한 우주의 힘, 공의 이치, 사랑, 로고스의 육화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 그는 두 종교의 보편성을 확보하고 두 종교의 근본적 메시지의 보편성을 더욱 넓혀나갔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신관을 숨김 없이 말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공의 이치가 곧 하느님이라 말하는 부분의 설명이 조금 부족하다고 느꼈으며 그로인해 그의 메시지가 내게는 가슴 벅차게 다가오지 않았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감동할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여러 한계들로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좀더 설득력있게 이해시켜달라고 외치며이 책에 매달리는 것은 나의 욕심일까? 한가지 더 희망이 남는 다면 이것이 이른 리뷰라는 것에 있다. 이 책은 열개의 장으로 이루어저 있는데 내가 읽은 것은 8장 까지이다. 이제 두장이 더 남아있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