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퍼는 1장에서 인간이 완전히 진리를 밝혀낼 수 있다는 낙관적 인식론에 반기를 든다. 진리란 인간에게 완전히 밝혀질 수 없으며 인간이 획득한 진리는 손 안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어느 순간 손 안에서 사라질 진리라면 그것은 진리라 부를 수 없게 된다. 때문에 포퍼는 해석이란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우리는 단지 해석할 뿐이다. 그리고 그 해석은 어느 순간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해석에 진리란 권위를 부여할 수 없기에 우린 그것을 의심하고 검증 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한다.

포퍼는 낙관적 인식론의 한계는 지식의 근원을 통해 지식이 유효함을 나타낼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 있다고 말한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번째

'향수' 소설은 그루누이가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서 버림받았고 아기 몸에서 당연히 나야 할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젖을 물렸던 보모가 기겁하고 도망간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쥐스킨트는 부모의 냄새를 제대로 맡지 못한 아기는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는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으로 그려냈다. 아기 냄새 중에서

위 인용은 "엄마의 냄새가 아이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의 근거로 소설 '향수'를 사용했다. 향수가 저 주장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는지 판단하기 위한 경험론자의 무식한 방법은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찾아가 이 해석이 맞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린 굳이 '근원'을 찾지 않아도 위 인용 문장의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루누이는 정말로 엄마 냄새를 맡지 못했기에 아기 냄새가 없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소설에서 엄마로 부터 바로 버림받은 사람은 모두 아기 냄새가 없어야 하는데 굳이 그루누이만 아기 냄새가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만약 엄마 냄새가 없는 모든 아이가 아기 냄새가 없다면 향수는 완전히 다른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향수는 그루누이에게 어떠한 특별함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여하고 있으므로 향수를 엄마 냄새가 중요하다는 것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

누군가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관념에 있다. 물질이 거기 있다고 지각하기에 물질이 거기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각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고 하자. 그런데 컵이 식탁위에 있다고 했을때 나와 내 아내는 동일하게 "컵이 식탁에 있다"고 지각한다. 그 어떤 사람을 데려와도 컵이 식탁위에 있다고 증언할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개개인의 관념이 어떻게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이 질문의 유명한 대답은 아래와 같다.

모든 개개인의 관념은 신의 관념안에 있기 때문에 서로 통일된 의견을 가질 수 있는 겁니다.

참으로 창의적이고 멋진 말이다. 마지막 문장으로서 그의 의견은 모순이 전혀 없고 완결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지성으로 판별해 모순이 없고 완결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진리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수 없다. 오히려 저 의견이 의미 없음은 그의 의견이 검증 불가능하고 반증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있다. (언젠가 진중권이 토론에서 신경질 조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반박하고, 어떻게 검증합니까!")

좋은 질문하기

사실의 근원을 파악해 주장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려는 시도는 좋은, 또는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다. 우린 보다 멋진 질문을 떠올릴 수 있다.

세번째

누군가가 "죽으면 사후세계가 존재하며, 그곳에서 정의로운 신에 의해 우리의 삶이 공정히 평가될 것이다."라는 주장을 했다고 하자. 사실 이 주장은 검증 불가능하다. 때문에 "죽으면 사후세계가 존재하냐?" 라는 주제를 탐구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 주장한 자는 성경을 들먹이거나 자신이 받은 계시를 말할 것이고 우린 결코 그것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어떻게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까?"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누군가는 그 질문에 대해 "사후 세계는 사람의 이 현실을 보다 좋게 개혁하려는 욕구를 무의식 중에 막을 수 있어. 죽은 뒤에는 모든 것이 공의롭게 재판되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저런 믿음은 기득권에게 유리하게 작용될 것 같아." 라는 답변을 할 수 있을것이고 또 누군가는 "사람들의 도덕 관념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겠는데? 공의롭게 심판받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믿는다면 '신'의 기준에 최대한 부합한 행동을 하려 노력할 것이고 이것은 전체 사회에게 이득을 줄거야." 라고 해석할 수 있을것이다. 이처럼 검증 불가능한 영역을 좀 더 검증 가능하고 토론 가능한 영역으로 옮겨오게 만드는 질문이 보다 유익하다.

우린 검증 가능한 질문을 떠올려야 하고 검증 가능하도록 사안을 '해석'해야 한다. 그것이 더욱 유용하고 유익하다.

정리

스스로 진리라 믿는 것에 칼날을 들이댈 필요가 있다. 그건 '해석'에 불과 하기에 파괴되거나 다른 멋진 '해석'으로 진화 할 수 있다. '삼각형의 합은 180도'라는 믿음에 칼날을 들이대보자. 구체 위의 삼각형에 저 말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유클리드 2차원 공간에서 삼각형의 합은 180도'라는 보다 깔끔한 정리가 탄생할 수 있다. "우주는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라는 믿음에 칼날을 들이댔기에 지동설이 나올 수 있었고 나아가 케플러의 이론이 나올 수 있었다. 칼 포퍼의 말처럼 지식의 진보는 이전의 지식을 재차 검증할 때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더 생각해볼 거리들.

우린 검증할 수 있는 권리를 포퍼로 부터 부여 받았기에 그의 말을 검증할 수 있다. 질문해보자.

  1. 검증, 논박, 기존 지식의 수정만으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2.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혜택들의 대부분은 과연 기존 지식의 수정을 통해 온 것인가?
  3. 검증, 논박, 수정만으로는 불충분하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 보다 나은 진리를 획득하는가. 우린 과연 진리를 획득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