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 - 민주화는 실패한 기획인가, 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
- 당대비평 편집위원회 엮음
- 웅진지식하우스
헌법재판소의 지루한 결정을 견디니 조희대가 왔다.
헌법재판소는 판결을 기다리다 지쳐버린 사람들의 아우성을 견뎌야 할 이유가 있었다. "(탄핵 선고가) 오래 걸린 건 말 그대로 만장일치를 좀 만들어 보려고…. 시간이 조금 늦더라도 만장일치를 하는 게 좋겠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했다."고 문행배 전 헌법재판관은 말했다. 헌법재판관은 국민의 분열을 우려했다. "만약에 몇 대 몇으로 나가면 어떻게 공격하냐면, 그 소수 의견을 가지고 다수 의견을 공격할 수밖에 없다. ⋯ 이런 주제를 가지고 재판관끼리 이견이 있는 상태에서 국민을 설득하기 힘들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조희대와 함께한 대법관들의 판단은 헌법재판관들과 달리 지체없었다. 절차를 어기는 것조차 감당해야 했던 대법관의 재빠른 선택에는 도대체 어떤 확신이 있었을까. 나는 가늠하지 못한다. 다만 조희대의 선택으로 모아질 것 같았던 국민의 생각과 말은 또다시 다른 방향으로 갈라져 서로에게 삿대질할 텐데 생생히 다가오는 미래의 단편에 아프다. 선출되지 않고 다만 선발되었을 뿐인 이들이 대한민국을 쥐고 흔드는데 나라의 주인된 자로서 할 수 있는 게 없어 맘이 탄다.
2007년에 출판된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 - 민주화는 실패한 기획인가, 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책에 담긴 이국운 교수의 〈지금 대한민국은 법률가들이 통치하고 있다〉는 대한민국의 본질이 민주공화국이 아니며 (비틀린) 자유주의적 법치주의라 말한다. 이 글이 놓인 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 우린 더 많은 시간을 견뎌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법률가들이 통치하고 있다
법률가 수호자주의의 기원
지금쯤 누군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법률가들이 대한민국의 수호자인가? 대한민국의 수호자들이라면 오히려 6·25 당시의 학도의용군이나 4·19의 학생들, 5월 광주의 시민들, 1987년 6월의 넥타이부대 등을 거론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법률가들이 없어도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국면마다 모습을 바꾸어 등장하는 시민들이 없다면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전혀 다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그런 시민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민들은 이미 분열되었고, 서로 외면하고 있으며, 각자의 자유, 각자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을 뿐이다. 이 분열과 외면과 투쟁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져서 도대체 어떠한 타협도 불가능하게 되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분열과 외면과 투쟁의 끝자락에서 드디어 법률가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여부도, 새만금 간척사업의 지속 여부도, 시각장애인의 안마사 자격 독점 여부도 모두 법률가들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또한 그것은 법률가들이 '관습헌법'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헌법을 뜯어고치고, 그 불문의 관습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선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는 해괴한 논리를 떠벌여도 시민들이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확신을 가지고 말하건대, 지금 대한민국은 일군의 법률가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청와대와 국회의 핵심을 차지한 법률가들은 사실상 조무래기들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을 차지한 법률가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며 최종적인 결정권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헌법 제 1조 1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선언이 과연 진실인지를 진지하게 되물을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은 과연 민주공화국인가? 아니면 법의 제국 또는 법률가 제국에 불과한 것인가?
지금 이 물음에 가장 쉽게 대응하는 것은 오늘의 현실을 하나의 일탈로, 따라서 깨우치기만 하면 금방 돌이킬 수 있는 하나의 정치심리학적 병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 않다. 대한민국이라는 체제의 내부에 이미 법의 제국, 법률가 제국의 가능성이 체계적으로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대한민국은 1945년 광복 이후 남한 지역을 지배했던 미군정의 품속에서 잉태되었으며, 1948년 여름의 헌법 제정을 통해 역사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정의 품속에서 잉태된 대한민국은 애초부터 '자유민주주의'라는 미군정의 세계관적 전제를 부인하기 어려웠고, 실상 그 상황적 변용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사법권의 독립'이라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교의에 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상당히 편향적으로 수용이 이루어졌다. 사실 이 미국식 정치체계는 '민주'와 '법치'의 길항적 공존을 그 본질로 한다. 때문에 사법의 정치적 위상과 관련해서도 '사법의 민주화 및 시민적 참여'를 강조하는 전자와 '사법권의 우위 및 법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후자가 끊임없이 정당성을 다투게 되는 것이다. 헌데 해방공간의 정치적 조건 속에서 대한민국은 결과적으로 전자를 불온시하고 후자를 교조화하는 방식으로 매우 편향되게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여기서 해방공간의 정치투쟁사 전체를 반추할 필요는 없다. 오로지 한 가지 초점, 즉 1945년 9월 미군이 진주한 뒤 불과 두 달 만에 식민지 사법기구를 현실적으로 장악했던 남한 법률가 집단에 주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일본으로 쫓겨간 일본인 판검사들을 대체하여 순식간에 집단적 신분 상승을 이룬 남한 법률가 집단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의 직업적 이해관계를 방어하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투쟁했다. 이들은 각계에서 터져 나온 민주적 사법 개혁의 요구들, 특히 배심제도나 판검사 공선제도처럼 '사법의 민주화 및 시민적 참여'를 강조하는 용어들을 체제전복을 기도하는 좌익적 주장들로 매도했으며, 그와 동시에 사법권의 독립이라는 미국식 헌정체제의 핵심 교의가 궁극적으로 자신들에 의해서만 수호될 수 있음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남한 법률가 집단의 이와 같은 주장은 논리적으로 미군정 내부에서 '사법권의 우위 및 법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일파, 즉 '법치'의 입장과 연결될 가능성을 배태했고, 동서냉전 및 남북분단의 형세가 굳어져감과 동시에 이러한 가능성은 실제로 급속하게 현실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1948년 봄 미군정과 남한 법률가 집단의 물밑 협상에서 매우 기묘한 합의가 도출되었다.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와 '공화'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자유'와 '법치'의 입장에서만 당파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사회적 삶이 자유를 추구하는 한 그것은 필연적으로 분쟁을 야기할 수밖에 없고, 그 분쟁은 법치의 방식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결국 사법 과정의 종국적 우위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독특한 사고방식, 곧 (비틀린) '자유주의적 법치주의'가 대한민국이라는 체제의 본질을 규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체제의 수호자로서 사법 과정의 법률가들이 지목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불거졌다. 도대체 누가 체제의 수호자인 법률가 집단이란 말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해방 직후의 짧은 기간 동안 사법기구를 현실적으로 장악했던 남한 법률가 집단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스스로에게서 찾고자 했다. 일제시대 이래 고등문관시험(고등고시)에 합격하여 민중을 재판할 수 있는 탁월성을 입증한 자신들, 오로지 그처럼 선별된 사람들만이 새로운 국가의 사법권력을 독점해야 한다고 이들은 강변했다. 법률가는 반드시 선발되어야만 하며, 결구 선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그처럼 선발된 법률가만이 사법권력을 독점할 수 있다는 논리야말로 '사법권의 독립'이라는 헌법적 교의에 관한 유일무이한 해석이라는 것이었다.
'법치'를 '민주'와 아무 상관없는 법률가들의 독점영역으로 관념하는 이런 사고방식, 다시 말해 사법권의 독립을 '사법권의 독점'으로 바꿔치기 하는 이 주장에 대하여 미군정은 짐짓 모른체하며 묵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대한민국을 잉태했던 미군정의 이런 태도는 1948년 여름의 헌법제정 과정에도 그대로 이어졌으며, 제헌 국회에 참여했던 제정파 역시 이 문제를 이미 해결된 것으로 취급하려는 입장으로 기울어졌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법률가 수호주의, 즉 오로지 선발된 법률가들만이 체제의 진정한 수호자가 될 수 있는 논리가 구성되었다. 그 결과로 남한 법률가 집단은 대한민국의 사법권력을 배타적으로 독점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들의 (비틀린) 자유주의적 법치주의는 일종의 체제적 본질로 내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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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치적 법복 귀족
하지만 남한 법률가 집단의 그와 같은 성취는 어디까지나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후 1980년대 말까지 약 40년 동안 대한민국의 권력집단 내부에서 그들은 소외되고 유폐된 주변부 엘리트 그룹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들의 (비틀린) 자유주의적 법치주의 역시 일종의 정치적 금기로 간주될 뿐이었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국가보안법의 입법과 함께 반공을 국시로 하는 위기정부(emergency government) 체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반란과 내전, 그리고 오랜 군부통치를 거치는 동안 대한민국은 헌법 위에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이른바 '이중규범'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반공위기 정부의 본질상 '집단적 생존'은 최우선의 가치이자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위협하는 어떠한 주장도 혹심한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남한 법률가 집단의 (비틀린) 자유주의적 법치주의만은 예외로 취급받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공위기정부가 구성되기 이전에 대한민국의 모태였던 미군정과 '먼저' 합의된 내용으로서 반공위기정부가 해체될 경우 곧바로 드러나게 될 체제의 진정한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반공위기정부의 권력자들이 '사법권의 독립'을 무시하고 사법권력에 대한 법률가 집단의 배타적 독점권을 침탈하려 할 때마다, 남한 법률가 집단은 그로 인해 1948년에 건설된 대한민국이라는 체제의 본질이 훼손될 수 있다는 점을 은밀하게 경고했다. 반민주가 아니라 반법치를 이유로 전개된 이 경고야말로 사실상 반공위기 정부의 권력자들에게 가해질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공격이었고, 다른 의미로는 대한민국이라는 체제 자체의 버팀목이자 후원자인 미국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호소였다.
대한민국이라는 체제의 관점에서 반공위기정부에 대하여 정치적 한계가 지어진 것은 바로 이 수준에서였다. 심지어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부세력조차도 대한민국이라는 체제의 제도적 수호자가 법률가 집단이며, 이들만이 사법권력을 배타적으로 독점한다는 미군정 이래의 전제를 전면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반공위기 정부의 권력자들은 이 전제 아래서 자신들의 권력을 극대화하는 방도를 추구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중앙정보부나 국가안전기획부와 같은 일종의 치외법권적 권력기구들을 확대함으로써 사법권력의 절대적인 규모를 축소했으며, 진보당사건, 민청학련사건, 김대중내란음모사건 등 소위 '체제 보위 사건들'의 최종적 해결 임무를 법률가들에게 양보함으로써 사법권력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반공위기정부의 이와 같은 우회 전략은 결과적으로 남한 법률가 집단의 (비틀린) 자유주의적 법치주의를 일종의 정치적 금기로 만들어버렸다. 권력의 장신구나 된 것처럼, 반공위기정부의 최종적 정당화의 요구를 기계적으로 처리해주었던 대다수의 법률가들은 자신들만이 체제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결코 당당하게 내세울 수 없었다. 법률가 수호자주의는 반공위기정부의 권력자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에 협조한 남한 법률가 집단 다수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서 정치적 금기로 전락했다.
이처럼 자신들에게 주어진 정치적 역할을 사실상 포기하는 대신, 남한 법률가 집단은 하나의 반대급부로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비정치적 이권에 집단적으로 탐닉하는 길을 선택했다. 전통적인 민사소송 분야와 대부분의 형사소송 분야에 관해서 법률가 집단은 '사법권의 독립'이라는 명분 아래 배타적 독점권을 누리고 있었으며, 다른 직업 집단에 비해서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직업적 자율성을 보장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48년 이래 엄격하게 고수해왔던 법률가 집단의 소수정예주의는 집단적 이권의 수혜자 규모를 매우 효과적으로 제한했다. 바로 여기서, 퇴직한 판검사가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형사사건을 수임하는 이른바 '전관예우'와 같은 관행이 급속하게 체계화되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법률가 집단을 규정하고 있는 '비정치적 법복 귀족'의 이미지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차곡차곡 형성되었다. 일단 중립적으로 말해보자면, 가장 밑바닥을 이루는 것은 물론 '법복'의 이미지이다. 제도적으로 법률가는 최종적 권력자이자 대한민국의 수호자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위로는 '귀족'의 이미지가 겹쳐져 있다. 왜냐하면 법복이란, 결코 선출되지 않고 다만 선발될 뿐인, 법률가라는 신분의 독점권이기 때문이다. 다시 그 위에는 '비정치적'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다. 이 법복귀족들은 군사쿠데타의 주역들과 정치브로커들이 득실거리는 정치의 영역에는 결코 발을 들여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 가지 중립적 이미지는 동시에 부정적인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다. 먼저 '법복'의 이미지는 '권력자'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무슨 소리를 해도 법률가들 또한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들의 일원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다음으로 '귀족'의 이미지는 '무위도식'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한 번의 고시 합격으로 일생을 보장받는 데 따르는 일종의 신분적 폐해, 즉 법률가들에게 일상적인 나태와 경쟁 회피 심리를 암시하고 있다. 또한 '비정치적'의 이미지는 '비겁한 속물근성'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마땅히 담당해야 할 정치적 책무를 방기한 채, 강한 자에겐 약해지고 약한 자에겐 강해지는 가증스런 두 얼굴이 법률가들의 정체인 것이다.
비교적 최근까지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들이 법률가 집단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양가감정은 '비정치적 법복귀족'의 이미지에 역사적 근원을 두고 있다. 한편에서 이 보통 사람들은 법률가들을 심히 두려워하며, 그 권력을 뱃속에부터 혐오한다. 특히 형사절차 속에서 전관예우라는 방식으로 불쌍한 서민들의 돈을 받아갈 때, 법률가들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증오는 극도로 고조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보통 사람들은 법률가가 되기를 염원한다. 자기가 아니면 자기 자식들이라도, 자기 자식들이 아니면 사돈의 팔촌이라도, 자기가 알고 있는 누군가가 이 혐오스런 법률가 집단의 일원이 되기를 진심으로 고대한다. 왜냐하면 이 '비정치적 법복귀족'들이야말로 1948년 이래의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으로 체제의 핵심에 정착한 엘리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 하나가 되거나 최소한 그들에게 연결되는 것만으로도 대한민국이라는 체제에서 일정한 성공을 기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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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과거 청산 또는 과거 회복
대한민국의 정치사에서 1987년ㅇ의 제9차 헌법개정은 반공위기정부의 시대를 마감하기 시작하는 중대한 분수령이었다. 따라서 이를 기점으로 종래 반공위기 정부 속에서 구성되었던 '비정치적 법복귀족의 신화'도 급속한 변화를 겪었다. 무엇보다 그 '비정치적' 성격이 더는 유지될 수 없었다.
본질적으로 1987년의 정치적 타협은 미래 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 지향적이었다. 정치적 타협의 두 주역이었던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은 일단 경제 성장의 빛과 독재정치의 어둠을 교환할 수 있는 적정한 지점을 찾아 돌아가고자 했다. 그리하여 찾아낸 것이 아직 신군부도 없었고, 광주도 없었으며, 10월 유신도 없었고, 3선 개헌도 없었던 1960년대의 어느 시점이었다. 4·19와 5·16이 각기 혁명이라고 주장되던 시가, 민주화 세력은 무기력하게도 4·19의 성과를 잃어버렸던 죄책감에 시달리고 산업화 세력은 무력에 의존하여 5·16을 일으켰던 원죄에 시달리던 시기, 그리하여 이 두 세력이 서로를 비난하면서도 각종 선거에서 맞붙어 간발의 차로 승부를 내던 시기, 6·25의 핏빛과 요정 정치의 낭만이 오롯이 살아 있던 그 시기로 돌아가 함께 다시 시작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87년 헌정체제가 시작된 지 2년 만에 들이닥친 세계사적 변화는 그와 같은 복고적 기획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동서 냉전구도가 무너지고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가 구조화되는 상황에서, 반공위기 정부로서 대한민국을 규정하는 것은 더 이상 시의성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91년에 이루어진 남북한의 UN 동시가입과 남북한 기본합의서의 서명은 대한민국이라는 체제가 반공위기정부라는 비정상적 상태를 벗어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 더하여 1980년대 이후 지속적인 경제 성장 및 시민사회의 활성화로 반공위기정부의 주축이었던 국가 부문의 비중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1987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씨를 당선시켰던 신군부 세력은 곧바로 이어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의 역풍을 만날 수밖에 없었고, 이런 흐름은 결국 1992년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민간 정치인인 김영삼 씨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런 이유로 1960년대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려던 87년 헌정체제의 초기 기획은 자연스럽게 한계에 부딪혔다. 그러자 곧바로 반공위기 정부가 구성되기 이전, 다시 말해 미군정과의 물밑협상을 통해 그 골격이 마련되고 건국헌법에서 확인되었던 1948년 체제의 진면목이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려 50년 가까이 장식적으로만 존재했던 대한민국이라는 체제의 규범적 본질이 놀라운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에 관한 단적인 증거는 12·12 군사쿠데타의 주역이었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사법적으로 처벌한 1995~1996년의 극적인 과거 청산 작업이었다. 주지하듯이, 이 역사적인 재판은 기실 매우 통상적인 사법 절차를 통해서, 사법 과정 전체를 독점한 법률가 집단의 관할권 속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것은 과거 청산인 동시에 과거 회복인 재판이었다. 청산된 것은 반공위기 정부였고, 회복된 것은 1948년 체제의 본질, 즉 선발된 법률가 집단을 체제의 수호자로 삼는 (비틀린) 자유주의적 법치주의였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관한 사법적 과거 청산 이후, 대한민국이라는 체제의 내부에 체계적으로 내장되어 있던 법률가 정치의 가능성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불과 수년전까지 정치적 금기로 통하던 (비틀린) 자유주의적 법치주의, 즉 '선발된 법률가들만이 대한민국의 수호자로서 사법권력을 독점하면서 최종적인 분쟁해결을 담당할 수 있다'는 명제는 이제 누구에게나 대한민국이라는 체제 자체를 상징하는 이념이 되었다. 이처럼 누구나 다 사법 과정의 최종적 권위를 주장하자 사법 과정의 정점에 놓인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당연히 바빠졌고, 그 정치적 중요성 또한 높아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정치 과정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한 뒤에도 헌법재판소를 통해 기왕의 결정을 뒤집으려는 시도들이 제도화되기도 했다. 이 모든 변화는 한 가지 초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법률가 집단이 체제의 수호자가 된다는 법률가 정치의 정당성이 그것이다.
물론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관한 사법적 과거 청산은 1948년 체제, 즉 (비틀린) 자유주의적 법치주의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계기로 활용될 수도 있었다. 특히 그 재판의 초기 진행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법률가들이 드러냈던 '비정치적 법복귀족'들로서의 면모는 '과연 이들에게 과거 청산을 맡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지하듯이 법률가 정치의 정당성을 정면으로 문제 삼는 이와 같은 문제제기는 제대로 수용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물론 50년 가까이 유지되어온 반공위기정부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게 남아 있었던 까닭이다. 이점에서 1994년의 1차 북핵 위기가 해결된 뒤 남북 정상회담이 예정되었다가 같은 해 여름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취소되었던 것은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었다.
모두가 기억하듯이, 사태는 오히려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무엇보다 1997년의 IMF 구제금융 사태는 (비틀린) 자유주의적 법치주의의 노골화 또는 법률가 정치의 전면화에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 하루아침에 반 토막이 되는 경제적 재앙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더 이상 민주화 세력의 권위에 기대어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종래의 방식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더하여 (IMF의 권고에 따라)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적 규모의 금융자본주의 체제에 한국 사회가 전격적으로 편입되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모든 가치를 환원시키는 화폐 정치의 위력에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분쟁의 최종적인 해결은 사법 과정을 통해 주어질 수밖에 없다는 미국식 세계 표준에 동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IMF 시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1948년 이래 대한민국이라는 체제의 본질이었던 (비틀린) 자유주의적 법치주의는 말 그대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정치와 경제, 공법과 사법의 모든 영역에서 사법 과정의 최종적 권위는 관철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 사법 과정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법률가 집단의 최종적 권위 또한 관철되었다. 나아가 한국 사회가 세계적 규모의 금융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면서, (비틀린) 자유주의적 법치주의는 일종의 보편적 정당성마저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변화에 힘입어 대한민국의 법률가 집단은 체제의 수호자를 넘어 상당히 적극적인 권력까지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2004년 한국 사회를 강타한 두 개의 헌법재판소 결정은 그 결정판이었다. 주지하듯, 그해 헌법재판소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를 부결하였으며 또한 '관습헌법도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통해서만 개정될 수 있다'는 해괴한 논리를 동원하여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로 통과되었던) 신행정수도특별법을 무효화했던 것이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법률가 집단은 어떠한 제도적 제약도 받지 않는 정치권력의 최고 정점에 서게 되었다. 결코 선출되지 않고 다만 선발되었을 뿐인 이들이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주인 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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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의 근본을 다시 사유할 것
이제 다시 석궁 테러 사건으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그 사건을 통해서 그 수학자가 타격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 자신과 그를 성원한 대한민국의 뭇 시민들이 제기하고자 했던 질문은 무엇이었는가? 위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들은 이미 법률가 집단이 체제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그리고 그 전제 위에서 다음과 같이 묻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 법률가들에게 대한민국이라는 체제의 핵심을 맡겨둘 수 있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대한민국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법률가들이 여전히 '비정치적 법복귀족'들이라는 사실이다. 1987년 이후 계속된 민주화와 시장화, 세계화의 급속한 변화에도 반공위기정부 시절에 형성된 '비정치적 법복귀족'의 이미지는 강력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우선은 법복이라는 권력자의 이미지, 또한 귀족이라는 무위도식의 이미지, 그리고 비정치적이라는 비겁한 속물근성의 이미지가 중첩된 채로 남아 있다. 바로 이 점을 근본적으로 재고하지 않는 한,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체제의 근본을 사유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현실이 언제나 그렇듯이, 이처럼 체제의 근본을 다시 사유하는 것은 한가로운 헌법학자의 상념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눈을 돌려보면, 주위는 온통 불리한 조건들뿐이기 때문이다. 석궁 테러 사건의 충격은 헌법학자의 상념 속에서만 맴돌 뿐, 법률가든 시민이든 각기 제 나름의 삶 속에 다시 갇혀가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석궁 테러 사건을 통해 제기된 위의 질문은 그대로 잊혀지고 말 것인가?
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지금 이 수학자는 스스로 피고인이 되어, 자신이 제기한 질문에 답변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우리를 몰아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우리의 '비정치적 법복귀족'들은 진정으로 곤혹스런 처지에 놓여있다. 왜 자신들만이 대한민국의 수호자들이 될 수 있는지를 그들은 이 주권자와의 최후의 승부를 통해 명쾌하게 증명해 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히 확인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선발된 법률가들만이 대한민국의 수호자가 될 수 있다'는 (비틀린) 자유주의적 법치주의로는 이제 아무도 설득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적어도 그보다는 진일보한 설득의 논리가 제시되어야 한다. 이에 관해서 일단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유주의적 법치주의의 관점을 좀 더 노골화하거나 정면으로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 글이 사용했던 '비틀린'이라는 조건을 과감하게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미 세계적 추세가 되어버린 미국식 세계표준의 관점에 의존하려는 경향도 존재한다. 경쟁을 거부하는 법복귀족의 나태한 속물 이미지를 질타하면서 법률가는 무엇보다 의뢰인의 이익에 복무하는 법률 서비스의 상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와 같은 미국식 세계 표준을 좀 더 정치적으로 고양시키려는 경향도 있을 수 있다. 법률 서비스 시장을 일종의 해석적 관점의 경연장으로 재해석한 뒤, 오로지 인격적 통합성의 관점에서 최고의 법률가들이 제공하는 해석적 대안을 통해 그 시장이나 국가가 통합될 수밖에 없음을 적극적으로 논증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자유주의적 법치주의의 정당화가 시도되는 간에, 회피될 수 없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해방공간 이후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정면으로 숙고되지 못한 문제, 곧 사법권의 독립을 '사법의 민주화 및 시민적 참여'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민주공화국의 핵심을 차지했으면서도, '민주'와 '공화'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유'와 '법치'의 관점에서만 스스로의 권력 독점을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는 반드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하여 법률가 정치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기 시작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민주'와 '법치'가 밀고 당기며 '공화'와 '자유'가 진장 속에 공존하는 그런 체제를 구축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1919년 기미독립선언 이래 우리 스스로 이 땅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자유민주정치의 원형적 모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