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 - 그 모든 우연이 모여 오늘이 탄생했다.
- 슈테판 클라인 지음, 유영미 옮김
- 포레스트북스
그는 저주 같은 건 없다고 딸을 안심시킨다. 운이란, 가령 좋고 나쁜 운은 있을 수 있다. 매일 성공이나 실패 둘 중 한쪽으로 슬며시 기운다. 그러나 저주는 없다 - Doerr, A.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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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야옹 야옹 소리가 들린다. 고양이가 아파트 1층 복도로 들어왔나보다. 시간이 지나면 고양이는 아파트를 벗어날테고 고양이 울음 소리도 사라질 것이다. 1시간이 지났다. 고양이 울음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학교에서 돌아온 11살 아들의 목소리와 섞여 들려왔다.
"아빠, 고양이가 날 따라왔어"
먹지 못해 뼈의 윤곽이 뚜렷이 보이는 작은 아기 고양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강아지 사료를 주었다. 배를 채운 녀석을 현관문 밖으로 나가게끔 유도했으나 녀석은 문 밖으로 발을 옮기려 하지 않았다. 녀석은 우리 집을 선택했다. 몇 시간 지난 뒤 집에 돌아와 고양이를 본 아내는 이 생명체는 뭐냐고, 고양이를 키울 수는 없다고, 당장 내보내라고 소리를 꽥 질렀지만 난 집에 들어온 아기 고양이를 들어 밖에 내려 놓을 만한 강단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내도 나와 마찬가지였기에 고양이는 우리 집에 눌러 앉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그녀와 내가 강단 없다는 건 큰 축복이었다.
아들은 고양이에게 깜냥이라는 성의 없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1년이 지난 지금 태평히 누워 창 밖을 바라보는 깜냥이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를 한 집에 있게 만든 그날의 우연에 감사하게 된다. 오늘 아내가 깜냥이의 머리를 쓰다음으며 이렇게 인사했다.
"깜냥아, 도대체 어떻게 우리 집에 오게 되었어? 이 이쁜 것."
1년 전 사건을 우연이란 단어로 담기엔 섭섭하다. 다른 단어는 없을까? '인연' 은 어떨까? '운명'은 어떨까? 교회 안수집사인 어머니는 '계획하심'이란 단어를 추천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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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피의 법칙은 나쁜 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야.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거지 - 『Interstellar』 Paramount Pictures, Warner Bros., Legendary Entertainment
배리 백쇼는 30여 년 전 어린 아들과 헤어진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당시 백쇼는 영국 군인으로 홍콩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영국에 남아 있는 아내가 다른 이와 사랑에 빠져 아들을 데리고 나갔기 때문이다. 백쇼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내도 아들도 백쇼와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게 옛 가족과 모든 연락이 끊어진 채로 30년이 지나갔다. 지금 백쇼는 휴양도시 브리튼에서 택시을 운전한다.
백쇼가 여느 때와 같이 택시를 몰던 2001년 8월 7일 남녀 커플을 태웠다. 백쇼가 시동을 걸었을 때 뒷자리 여성 손님이 택시 면허증에 적힌 특이한 성을 보고 놀랐다. 옆에 앉은 남자 승객이 '백쇼'란 성을 보고 물었다. "혹시 이름이 배리 아닌가요?". 배리 백쇼와 아들 콜린은 이렇게 재회하게 되었다. 이건 너무 기막힌 우연이라 운명 따위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늘을 보게 한다.
"정말로 우리가 모르는 어떠한 힘이 존재하는 걸까?"
하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일어날 확률이 있는 사건은 발생한다. 미국 로또 번호 49개의 숫자 중 여섯개를 정확히 맞추고 보너스 숫자까지 맞출 확률은 1억 4000만 분의 1이다. 살면서 벼락에 맞을 확률의 14분의 1밖에 안된다. 그러나 우린 미국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가 모르는 어떠한 힘'의 존재를 느끼지 않는다.
배리 백쇼가 아들과 재회한 사건은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본질적으로 같다. 전혀 접촉점이 없던 사람이 우연히 만날 확률은 굉장히 낮지만 세계의 60억 인구를 고려한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그 행운을 마주할 것이다. 2001년 8월 7일 배리 백쇼는 커다란 복권에 당첨 된 것이다. (배리 백쇼에게 일어난 사건과 로또 당첨을 생각해보면 고양이가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하는 아파트 1층에 사는 아이와 함께 집에 들어오는 일은 흔한 일일지도.)
〈백만 분의 일 확률〉의 사건은 그 빈도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고 조금도 더하지 않는 빈도로 반드시 벌어진다. 물론 그 사건이 우리에게 벌어진다면 우리가 엄청 놀라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 R.A 피셔
우리가 확률에 의해 일어난 개별 사건에 집착할 때 섭리는 손을 벗어난다. 그때는 사건에서 멀리 벗어나 사건 전체를 바라보자. 수많은 개별적인 우연들도 거리를 두고 수많은 동종의 사건들을 관찰하면 조화로운 전체로 어우러진다. 하지만 개인이 자신에게 현실로 실현된 작은 확률-사건에 거리두기란 어렵다. 더군다나 자신의 의지가 개입 되지 않았을 땐 더더욱 그렇다. 우리가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는 사건에도 인과관계를 살피고 사건이 담고 있는 배후의 목적을 탐구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간은 발생하는 모든 사건에서 목적성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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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의 존재론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는 우리는 마음과 의도의 흔적이 없는 곳에서도 그것을 인식하는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 House, P. The Lifelike Illusions of A.I. The New Yorker
인간이 모든 사건에서 목적성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까닭은 뇌가 복잡한 개별 사건을 각각 처리할 만큼 뛰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처리하려면 개별 사건을 일반화, 추상화하고 인과 관계를 부여해야 한다. 허나 규칙을 발견할 수 없는 우연은 단순화를 거부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규칙와 법칙을 끌어내야 속이 편하다. 인과관계를 밝히지 못했다 해서 포기할 수는 없다. 사건의 배후에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 어떨까? 괜찮은 것 같다. 목적이 있다면 목적의 배후에 목적을 실행해 옮긴 초 자연적 존재가 필요하다. 초자연적 존재를 상정하고 마음이 드는 이름을 붙여 놓으니 우연이 운명이 되고 더불어 감사할 수 있는 대상이 생겨 좋다.
세상에는 감사할 수 있는 우연만이 있는게 아니다. 피하고 싶은 우연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재난 말이다. 도대체 어떤 목적을 붙여야 갑작스럽게 다가온 재난을 수용할 수 있을까? 이를 다루는 텍스트 중 욥기만한 게 없다. 의인 욥은 자신을 시험하는 사탄 때문에, 그걸 허락한 여호와 때문에 온갖 고난에 처한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닥친 재난의 원인이 욥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 빌닷, 욥기 8장 4절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 소말, 욥기 11장 14절
이 해석에 빡친 욥의 대답이 맘에 든다.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 욥, 욥기 12장 2절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 - 욥, 욥기 19장 2절
욥을 화나게 만든 해석은 오늘날에도 흔하다. 주위 사람 뿐 아니라 재난을 마주한 당사자도 이런 해석을 받아들인다. 인생에 위기가 닥치면 이를 설명하려는 욕구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살아남거나, 눈앞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목격하거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왜 자신은 살아남고 다른 사람은 떠났는지에 대해 답을 얻고자한다. 그들이 얻은 답은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자신이 그 일을 되돌릴 수도, 그 일에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었음에도 말이다. 해답이 없는 것 보다 잘못된 해답이라도 있는 게 낫기에 자기를 파괴하면서까지 그 해답을 받아들인다.
친구의 해석을 거부한 욥은 자신에 닥친 설명할 길 없는 고난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 욥, 욥기 19장 2절
"재난과 고통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신은 도대체 뭘합니까?" 란 질문에 답을 주는 이 구절은 기독교인에게 인기 많다.
욥이 정금과 같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욥은 여호와를 직접 대면한 몇 사람 중 하나가 되었고 여호와는 욥에게 처음보다 더 큰 복을 주었다. 욥은 많은 재산과 많은 자녀, 장수하는 복을 받았다. 아쉽게도 사탄의 시험 도구로 활용된 죽은 욥의 자녀들에 대한 언급은 성경에 없다. "천국에서 행복했습니다" 라는 언급이 있다면 유치했으려나.
난 요한복음 9장 의 일화를 좋아한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제자가 예수에게 저 소경이 소경된 까닭이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냐고 묻는다. 예수는 죄로 인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고 말한 뒤 소경의 눈을 뜨게했고 눈 뜬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다. 예수는 죄가 고통을 낳는다는 인과관계의 통념을 전복시켰다. 말 더듬이 심해 놀림감이 되었던 14살 그때 예수의 저 답변이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는지. 하지만 오늘날 예수가 같은 질문을 다시 받는다면 하나님이란 단어를 제외한 다른 문장으로 질문에 답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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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모든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천체 운동과 지상 운동을 아우르는 일반 법칙이 지적 세계를 사로잡았고 예측과 관찰 사이의 합치는 법칙의 완벽성을 증언했다. 뉴턴이 지배하던 세계는 시계의 기계 장치와도 같아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의 현재 상태를 과거의 결과로, 그리고 미래의 원인으로 파악할 수 있다. 특정 시점에 자연 안에 있는 모든 힘과 존재물의 상호 위치를 모두 알고 있는 지적 존재자가 있다면, 그리고 이 지적 존재자가 모든 자료를 분석할 수 있다면 우주 안에 있는 거대한 별에서 미세한 원자에 이르는 모든 존재물의 운동을 단 하나의 수식으로 압축해 낼 수 있다. 그러한 지적 존재자에게 불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 그에게는 미래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져 있다. - 라플라스
라플라스를 비롯한 결정론자들은 일어난 모든 일이 이전 상태의 직접적 결과라면 현재를 들여다보고 방정식을 풀기만 해도 우주에 대해 신과 같은 지식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대는 오래 가지 않았다. 과학의 필수적인 도구인 수학의 토대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산술과 기하학의 기본 구조를 구성하는 공리가 경험에 의해 채택되므로 그 구조가 갖는 적용성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고 어디에 적용 가능한가는 오직 경험에 의거해서만 결정된다는 사실을 수학자들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예를 들어 유클리드의 평행성 공리는 비유클리드 공간에선 성립하지 않는다)
힐베르트, 러셀 등 수학자가 수학의 토대를 단단히 만들기 위해 애썼지만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해 - 폰 노이만의 표현에 따르면 - 끝장났다. 괴델은 답을 찾지 못한, 참과 거짓을 확정할 수 없는 질문이 항상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수학으로 증명했다. 또한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이 존재하지 않는 논리 체계에는 필연적으로 모순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 원리를 발견했다. 불확정성 원리는 장소와 임펄스(힘의 크기와 힘이 작용한 시간의 곱), 에너지와 시간이라는 측량 단위는 서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한 가지를 결정하면 다른 한 가지는 불확실하고 우연한 결과가 된다고 말한다. 즉 특정 시간의 장소와 임펄스를 함께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측정만 불가능한 게 아니다. 양자는 입자며 동시에 파동이라서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불확정성 원리는 뉴턴 물리학이 약속한 세계 장치 우주를 믿는 모든 사람의 희망을 갈기갈기 찢었다. 우리는 미래,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 자체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이전에는 모든 결과에 대한 원인이 있었으나 이젠 확률의 스펙트럼이 존재할 뿐이다. 만물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물리학이 발견한 것은 합리적 신이 지배하는 단단하고 확고한 실재가 아니라 우연을 가지고 노는 신이 만든 희한한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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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사실을 단순한 법칙으로 환원하는 능력,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줄 아는 능력은 인류의 진보에 크게 이바지 했다. 흩어진 사물을 단순한 법칙으로 환원한 물리 법칙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하지만 우주는 여전히 논리의 손길 바깥에서 우리가 길들일 수도, 써먹을 수도 없는 우연과 혼돈의 지배를 받고 있다. 세상은 정신없이 복잡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히 이해 못할 리듬 안에 갇힌 채, 경이로운 무질서 속에서 살아간다. 자연을 한꺼번에 아우를 법칙과 세상의 복잡성을 간단히 정리할 개념은 정말 없다. 그렇다면 이성으로 세계를 단순화하고 확장함과 동시에 우리의 연약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불확실하면 불확실한 대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치 자연처럼.
진화론에 따르면 자연은 우연의 결과다. 잠자리 같은 생명체는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다윈에 따르면 새로운 생명체는 유전자를 도구로 한 무작위적인 실험에서 탄생한다. 다윈은 자연의 다양성을 우연으로 설명한다. 어떤 생물도 계획에 따른 것은 없다. 목표도 의도도 없었으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겠다는 야망도 없이 우연이 주는 불확실성의 혜택을 누렸다.
우연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잠자리에서 파리로의 진화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연을 거부하고 첫 계획에 따라 엄격한 논리로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키는 사람은 꼼꼼하고 심오할지는 몰라도 다양한 아이디어를 길어 올릴 수는 없다. 목적 지향적인 사고는 세세한 부분을 살필 수는 있지만 새로운 것을 빚어내긴 어렵다. 물론 우연이 이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 논리가 있어야 착상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 점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에 우연에 대해 열려 있는 개방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오늘날 사회주의 국가의 계획 경제보다 자본주의 경제가 더 우월함이 명백히 밝혀졌다. 여러 이유를 말할 수 있겠지만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계획적 사고의 태생적 오류 때문이다. 세계가 점점 더 복잡하게 얽히게 됨에 따라 단 1주일 후의 세상을 상상하는 것도 불가능한 오늘 1년, 반년, 분기 계획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스크바의 행정부는 나라에 얼마나 많은 신발이 1달 뒤에 필요할지 알 수 없다. 자본주의는 계획 경제와 달리 단계적으로 더듬으며 나아간다. 시장경제에서는 모든 공급자와 수요자가 나름대로 결정을 하고 그 결정이 계속 시장에 반영된다. 여러 개로 잘게 쪼개진 다양한 경제 주체들이 때로는 그들의 능력에 기반해, 때로는 얄궂은 역사의 우연에 의해 선택되어 사회 전체의 번영에 이바지한다.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고, 우와 열을 함부로 가르지 않고, 큰 계획 보다는 작은 행동으로, 한번의 큰 도약이 아닌 작은 발걸음으로. 자연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우연을 다루는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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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에선 문학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우연을 다루려 애쓰고 있다.
바로 독자의 욕망을 넘어서서, 사건이 영원하게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작업이지요. 독자는 그러한 좌절을 받아들여야 하고, 또 그것을 통해 '운명'의 전율을 느껴야 합니다.
... 모든 위대한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수정 불가능한' 이야기들의 기능은, 운명을 바꾸고 싶은 우리의 모든 욕망과는 달리, 그것을 바꾸기 불가능함을 우리가 직접 손으로 만져 보도록 만드는데 있습니다. ... 하이퍼텍스트 이야기는 자유와 창조성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죽는 방법까지 가르쳐 줍니다. - 움베르토 에코 『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 열린책들
우린 문학을 읽으며 작가가 사전에 선택한, 이미 끝이 결정된 이야기에서 운명을 느끼고 그 속에서 하염없이 무력한 인물과 나 자신을 동시에 마주한다. 문학을 통해 거부할 수 없는 우연을 수용하고 문학 속 인물과 나를 함께 위로한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 에서 가장 와닿았던 문장을 옮긴다.
아이들에게는 동화가 필요하고 어른들에게는 신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삶에서 위기를 겪을 때 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경험을 의미와 연관지으려고 노력한다. 좋은 징조에 대해 기뻐하고, '운명의 눈짓'을 따르며 삶의 중요한 전환기마다 더 높은 계획이 작용했다고 믿는다.
이런 태도는 해석과 사실을 구분하고, 상상의 산물을 결정의 근거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려면 이중 장부를 쓰듯이 하나의 경험을 두 가지 현실로 분류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점검 가능한 사실의 세계에 발을 디디고 사실만을 행동의 근거로 삼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해석과 환상의 영역으로 들어가 경험을 신비로운 시각으로 관찰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모순 아닌가? 사건에서 해석과 사실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명백히 선을 그으라니. 허나 저자가 말하길, 실재로 해보면 훨씬 간단하다며 등을 민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우린 실제로 그렇게 한다. 영화에 감동 받아 눈물을 흘리는 감정 자체는 진실이지만 우린 한순간도 이 영화가 허구임을 의심하지 않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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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냥이가 노트북에 머리를 박치기 하며 지나간다. 고 녀석 참. 우연이라 부르니 충분하면서도 부족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