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의 목을 친 남자 - 프랑스혁명의 두 얼굴, 사형집행인의 고백
- 아다치 마사카쓰 지음, 최재혁 옮김
- 한권의책
프랑스 혁명을 한복판에서 경험한 사형집행인 샤를 앙리 상송(이하 상송)의 이야기가 쉽고 재미있게 쓰여있다.
머리를 손질하거나 양초를 만드는 직업은 어떤 사람에게도 명예로운 일이 될 수 없다.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드먼드 버크)
그 시대의 사형집형인은 집의 외벽 전체를 붉은색으로 칠해야 했다. 딸이 있다면 처형인의 딸과 사랑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현관 정면에 딸이 있다는 사실을 써 붙였다. 사형집행인은 손이 닿는 것조차 꺼려지는 불가촉천민 취급을 받았다. 사형집행인이 무시당하고 차별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잔혹한 형을 아무렇지도 않게 집행한다는 편견 때문이었다.
사형집행은 보기와는 달리 어려운 일이다. 사형집행인은 교수형, 참수형, 수레바퀴형, 능지처참형 등 다양한 집행이 실수 없이 진행되도록 신체를 훈련해야 했다.(의술과 해부학을 공부해 의사로 활약할 정도였다.) 잔혹한 형을 아무렇지 않게 집행한다는 편견과 달리 상송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고통스러워 했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마음을 단속해야 했다. 상송은 두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일을 정당화 했다.
- 상송 자신의 직무는 사회의 안녕을 위해 범죄자를 징벌하는 정의의 행위이다.
- 사형집행인은 국왕에게서 범죄자를 처벌하는 임무를 위임받았다.
상송은 사형집행인의 일에 정당성을 부여해 줄 국왕이 절실히 필요했기에 혁명을 반기면서도 공화정이 아닌 입헌군주제를 원했다. 상송의 손으로 루이 16세를 죽게 한 역사의 무심함이 두렵다. 루이 16세를 집행한 후 상송과 상송의 아들이 사형폐지를 주장한 것은 자연스럽다. 자신의 일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 사람이 죽었으니 더 이상 자신의 일을 합리화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명분을 획득한 군중의 잔혹함에 고개를 돌리는 이들이 많았다. 상송은 군중의 무지몽매와 잔혹을 가장 앞에서 경험해야 했다. 사형 집행이 잔혹하다며 비난하던 사람들이, 사형수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사형수의 악마성이 집행인에게 옮겨 갈 수도 있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학살을 이어나가는 것을 본 상송의 마음은 곤혹스러움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왕비와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이유로 이목을 집중시켰던 랑발 공비는 즉결 재판장에 끌려와 왕비를 모독하고 왕정에 반대하는 선서를 하도록 강요받았다. 이를 거부하자 사람들은 그녀를 거리에서 참수한 후, 옷을 모조리 벗기고 배를 갈라 내장이 다 드러나게끔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녀의 잘려진 머리를 창 끝에 건 채 파리 시내를 행진했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볼 수 있도록 탕플 탑앞에 세워두었다. 이때 그녀의 목은 새롭게 장식되었고, 입에는 포도주를 부어넣었으며 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술을 운반자가 게걸스럽게 마셨다고 전해진다.
당시 시대상이 잘 나타나는 '코로' 에피소드를 여기 줄여 소개한다.
당시 모든 돈은 금속으로 주조되었다. 금화라면 그 동전에 함유된 금의 양에 따라 가치가 보증되는 방식이다. 헌데 혁명정부는 돈을 전부 금속으로 만들 만큼 충분한 제원을 확보할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종이로 돈을 만들어 강제로 가치를 부여했다. 처음 지폐가 등장했던 그 때는 가짜 돈을 만드려는 유혹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혁명정부는 지폐 위조를 중대 범죄로 규정해 무조건 사형판결을 내렸다.
코로는 위폐범 중 하나였고 여느 범죄자와 마찬가지로 센 강변의 그레브 광장에서 처형될 운명이었다.
상송과 코로를 태운 마차가 그레브 광장으로 들어서자 처형대 주위를 빽빽히 둘러싼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카루젤 광장으로!" 라고 외치며 코로의 처형 장소를 카루젤 광장으로 옮기라고 주문했다.
코로의 처형일은 시기적으로 왕정이 쓰러진 직후였기에 국내외 반 혁명집단에 대한 증오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레브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지폐 위조범을 지금 까지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는 것이 아니라 카루젤 광장으로 옮겨 처형할 것을 요구했다. 카루젤 광장은 최후의 국왕 루이 16세가 머무르는 궁전 앞에 있었다. 군중은 그의 처형 과정을 루이 16세 앞에서 전시하려했다.
상송은 난처했다. 그에겐 명령의 내용을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고 기요틴를 이동시키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다. 기요틴를 해체하고 옮기고 다시 조립해야 하는데 이 작업에만 몇 시간이 넘게 걸린다. 또한 집행을 질질 끄는 것은 사형수가 느끼는 공포를 가중시켜 사형 집행 과정을 수월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사형 집행에는 사형수의 도움이 필요하다)
상송은 최선을 다해 군중을 설득했고 군중과 상송은 파리 시청에 전갈을 보내 새로운 지시를 기다리기로 합의했다. 상송은 파리 시청이 이 요구를 기각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착각이었다. 시청은 민중의 집단 행동에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고 민중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명령에 따라 상송의 조수들이 처형대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그 모습을 보고 환호했다. 그들 중 몇 명은 난간을 넘어 처형대를 해체하는 작업을 거들어주려고 했다. 상송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 처형 도구라면 부정 탄다며 손을 대는 것조차 꺼려하던 사람들이⋯. 」
상송은 처형대 해체작업을 돕는 민중들을 지켜보며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자유와 평등 사상이 실현된 가운데 왕정이 무너지고 혁명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와 열의가 차별의식을 완화시키기도 했지만, 처형방법이 기요틴으로 일원화된 것도 사형집행인과 일반인을 가깝게 만들어주었다.
능지처참형과 수레바퀴형과 같은 잔혹한 형벌과 칼을 휘두르는 참수형을 집행하는 처형인을 일반인은 멀리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요틴이 등장한 뒤로 기계를 조작하는 처형인은 이전보다 훨씬 중립적인 존재, 보통의 관리에 가까운 인간으로 인식되었다.
수십 명의 군중들이 도움으로 해체작업이 빠르게 끝났다. 군중은 자재들을 마차에 운반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카루젤 광장으로 이동하던 중 난동이 벌어졌다. 사형수 코로가 마차 안에서 미쳐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착란상태에 빠진 그는 사납게 울부짖으며 거칠게 뒹굴다가 진정시키기 위해 다가간 상송의 조수를 물어뜯기도 했다.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사형수의 신경은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끊어져버린다. 상송은 당황했지만 군중은 반대였다. 그들은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포도주 병을 돌려가며 술을 마시기도했다.
카루젤 광장에 도착했다. 군중들이 기요틴의 재조립을 도운 덕분에 보통 몇 시간 걸리는 일이 금방 끝났다. 허나 착란상태에 빠진 사형수는 더욱 격렬하게 날뛰었고, 상송의 조수들이 군중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일을 할 수 없을 지경으로 취했기에 사형 집행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 사형수가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으니 기요틴에 눕히려면 적어도 세 명이 필요하다. 날도 어두워져 불빛도 필요하니 이대로 집행하기는 불가능하다. 사형 집행을 연기해야 한다.」
상송은 사정을 군중에게 설명하고 누가 청사에 가 집행 연기 허가를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군중은 비난으로 화답했다. 한 젊은 남자가 상송을 향해 외쳤다.
「 당신은 국민의 적을 도와주려는 속셈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배신자다. 우리들이 당신의 코를 기요틴의 구멍 속에 밀어넣고 말겠다! 당신의 조수들이 술에 취해 일을 할 수가 없다고? 그까짓 조수쯤은 당신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않는가? 반동의 피를 시멘트 삼아 국민들을 단결시키고 조국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숙명이다. 국민들의 적을 처단하는 일에 자긍심과 보람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있는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동지들, 그렇지 않나? 」
군중들은 그렇다고 답했으나 정작 처형대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은 슬금슬금 뒤로 몸을 뺐다. 이 장면을 보고 상송은 군중들의 외침에 실체가 없음을 알아차렸다. 상송은 상황을 계산했다. 언제까지 어정쩡하게 시간만 끌 수는 없었다. 상송은 용기를 보인 젊은이에게 도움을 청해 사형을 집행하기로 결심했다. 젊은이는 상송의 제안에 화답했다.
상송과 젊은이, 술에 취하지 않은 조수 한 명이 힘을 합쳐 사형수를 마차에서 끌어내렸고 저항하는 그를 처형대 위에 올렸다. 처형대 위에 선 코로는 기요틴의 서슬 퍼런 칼날을 보자마자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며 "죽고 싶지 않아"라고 울부짖었다. 소란스럽던 광장이 순식간에 정적에 빠질 만큼 처절한 비명소리였다. 거의 격투를 벌인 끝에 사형수를 제압하여 기요틴 위에 엎드리게 할 수 있었다.
사형수를 기요틴 위에 끌어다놓기는 했지만 워낙 격렬하게 목을 뒤틀며 저항했기 때문에 이대로 집행을 하다가는 칼날의 위치가 빗나갈 가능성이 높았다. 기요틴의 칼날이 두개골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목이 잘리는 대신 더 비참한 대형 사고가 발생한다. 그래서 몸집이 큰 조수가 사형수 위에 올라타 움직이지 못하도록 눌러야 했다.
조수를 자청한 젊은이는 겉으로는 냉정함을 잃지 않았지만 이미 낯빛이 창백해졌고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흥분과 공포에 사로잡혀 날뛰는 사형수의 모습에 기가 질릴 대로 질렸으면서도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신과 싸우고 있는 젊은이의 심리상태를 상송은 고스란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 자네는 훌륭한 애국심의 증표를 보여주었네. 가장 중요한 역할을 자네에게 맡길 테니 마지막을 장식해주게나. 」
상송은 칼을 묶어놓은 끈을 젊은이게게 건네주었다. 청년은 상송의 신호에 맞춰 끈을 풀어 칼날을 떨어뜨렸고 사형수의 목이 바구니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상송은 낯빛이 하얗게 질린 젊은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 마지막으로 죄수의 머리를 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순서를 잘 알겠지? 」
군중들은 처형의 다음 의식을 기다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젊은이는 얼이 빠진 듯 두 발이 얼어붙은 채 서있었다. 상송이 말했다.
「 힘들면 무리하지 않아도 좋네. 조수에게 시킬 테니⋯ 」
상송이 말하자 젋은이는 분개하며 자신이 하겠다고 소리쳤다. 젊은이는 코로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처형대 중앙에 멈춰 서서 군중들에게 머리를 보여주려던 바로 그 순간, 젊은이는 돌연 뒤로 넘어갔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극도의 긴장상태를 버텨내지 못하고 뇌졸증을 일으켰던 것이다.
처형대 위에 서는 것은 비일상적 공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다. 처형에 임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의미를 찾아야 하고 그에 맞는 긍지가 필요하다. 사람을 죽인다는 공포와 괴로움을 견뎌낼 수 있는 정신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확신, 세상의 비난에 맛설 수 있는 강인함도 갖추어야 한다. 비전문가는 처형대 위에서 사람을 처형하는 중압감을 감당해낼 수가 없다.
처형에 실패한 사형집행인은 책임을 추궁당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젊은이는 처형은 성공시켰으나 자신이 죽음을 면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