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애처러운 눈으로 “대화를 하자”고 말을 하는 소크라테스의 만화 속 표정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내가 진짜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은 최근이다. 어느 날 친구들과 일상 대화를 하는데, 난 내 말이 그에게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튕겨져 나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그를 통과해 전혀 상관없는 다른 이야기로 내게 되돌아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가며 다른 이와의 대화를 관찰해보니 이런 일은 굉장히 비일비재했다. 이전에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은 그를 통과해 되돌아오는 그 이야기에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직 내 말만을 했기 때문이었다. 오호, 이 사실을 알고 상대방의 말에 반응하는 나를 관찰해 보았다. 나라고 다를 손가. 나 또한 그의 이야기를 거칠게 뱉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알았다. 대화를 하려 했기에 대화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고, 남들이 내 말에 관심이 없다는 것과 나 또한 남의 말에 진실된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았으니 이제 되었다. 이젠 어렵더라도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

그런데 대화란 무엇인가? 대화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대화(Dialogue)둘 이상의 실체 사이의 상호적인 언어 소통이다.

사전적 의미는 위와 같지만 어떠한 사물이나 관념을 규정하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외부에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망치”는 물체를 치는 데 쓰이는 도구이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외부에 따라서 살인 도구로 쓰일 수도 있고, 건물을 만드는 도구로 쓰일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화’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사용하는 외부의 실천적 양식에 따라서 전혀 다른 수단으로 사용된다. 이에 3가지 경우를 살펴본다.

내 마음 속 숨어있는 자아의 경우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에게 씨를 뿌려 자손을 낳고 싶은 욕구는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일까? 생명을 낳는 다는 그 욕구 너머 나의 생각을 전파하고, 그 생각으로 남을 지배하고 싶다는 욕망이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간직 해야 할 소중한 것 있다면, 내 삶을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 있는 것” –내가 좋아하는 이 노래 가사는 이 욕구를 교묘하게 숨기고 있는 듯 보인다. ‘삶을 나눈다’는 그 빛나는 드레스를 벗기면 내 삶을 남에게 적용하고 싶다는, 내 생각의 씨앗을 그의 머리 속에 심고 싶다는, 그것으로써 그에게 단순한 공감을 넘어서는 찬양을 받고 싶다는 어처구니 없는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이 경우 대화는 이 목적 아래서 자신을 전파하는 도구이다. 코엑스의 도인과 대화를 해본 적 있는가? 그들은 순진하고도 청결한 목적 아래 감추어진 이 욕구를 보지 못한 채로 웃음을 지으며 “나 처럼 살아봐요, 행복해질 거에요” 라고 말한다. 나 역시 다른 이에게 저렇게 말하는데 내가 저 말을 온전히 믿을 손가? 이 경우 대화란 남보다 우월해 보이는 듯한 나를 남에게 강요하기 위한 도구이다.

소피스트의 경우

소피스트에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다면 이들이 솔직하다는 점이다. 저 옛날 그 때 그 시절에 그리스인들은 벌써부터 놀라운 생각을 했다. “만물은 변한다.”라고 일찍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것이다. 이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것이 관찰자의 시작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른바 상대주의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니체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도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도덕적 믿음이 다양하고 보편적이지 않다면, 아마도 모든 도덕은 만들어졌거나, 관습의 문제일 뿐이야” -- 하룻밤의 지식여행 "플라톤"편 중에서

“도덕은 약자가 강자를 구속하여 그 힘을 저지하기 위한 발명이고, 힘은 최고의 덕이며 인간 최고의 욕구야”  -- 윌 듀랜트의 철학이야기 중에서

잘못된 것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도 히틀러를 낳지만, 절대적인 옳음이란 없다는 이것 또한 윤리적 회의주의를 낳을 수 있고, 종국에는 윤리적 허무주의까지 이르게 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소피스트에게 대화란 무엇일까? 세계 최고의 변론술을 자랑했던 그들에게 있어 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절대적인 옮음의 가치가 없는 그들에게 대화란 단지 이 세계에서(그들은 이 세계, 저 세계라는 이분법적 사고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성공하기 위한 기술이었다. 대화란 그름을 옳은 것으로 둔갑시키거나 옳음을 그름으로 둔갑시키는 기술이었고(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다, 왜냐면 그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논쟁에서 이겨 이 세계에서 부를 축적하기 위한 도구였다. 소피스트의 경우, 대화란 절대적 옳음이 없는 이 세계에서 승리하기 위한 무기이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행위를 보았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사회를 어그러지게 하는 것을 목격했고, 그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들의 생각이 사회에 팽배해지면 그가 사랑하는 아테네는 무너지고 말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변하고도 물렁한 지대가 아닌 곧고도 단단한 반석 위에 자신의 나라와 세계를 올리고 싶었다. 그가 믿은 그 반석이란 무엇인가? 바로 “진리”이다. 장소와 시간을 뛰어넘은 진리, 그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또한 간절히 그것을 원했다. 소피스트에게는 승리하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한 변증법을 그는 철학의 도구로 사용했다. 상대방을 이기고 넘어뜨리기 위한 수단이 아닌 어두운 곳을 밝혀줄 진리의 안내자로 대화를 사용했다. 이 경우 소크라테스에게 대화란 “진리”에 다가가기 위한 도구이다

잠깐 소크라테스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그렇고 말고 파이돈, 그런데 진리나 확실성이나 지식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사람이 처음에는 옳다고 여겼으나 후에는 거짓임이 밝혀진 어떤 이론에 부딪혔다고 해서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지능의 결핍을 탓하지 않고, 괴로운 나머지 결국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이론 전반에 기꺼이 책임을 돌리고, 그 후에는 영원히 이론을 미워하고 욕하고, 실재에 관한 진리와 지식을 상실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일인가?

...

승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논쟁을 할 떄, 문제가 정당한 것인가 하는 점은 개의치 않고 오직 듣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주장을 확신시키고자 애를 쓰네. 그는 청중이 그의 말을 옳게 여기도록 애를 쓰는 데 반해 나는 오히려 나 자신을 확신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네.

...

나는 자네들에게 진리만을 생각하고, 소크라테스의 일은 생각하지 말라고 요구하겠네. 내가 자네들에게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되면 나에게 동의하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열정 때문에 자네들과 나 자신을 기만하는 일이 없도록, 전력을 기울여 반대해 주게. – 플라톤의 파이돈 중에서

글 투에 드러났겠지만 난 ‘소크라테스의 경우’ 나타난 대화의 사용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아닌 다른 2개의 경우 대화의 목적, 그 뿌리로 들어가 보면 “나”라는 원자를 발견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 “나”라는 뿌리를 “진리”로 바꾸어버렸다.

이제 나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과거 대화 중 나 자신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으면 속상해하고 분해 했으나 이제는 그러지 않을 수 있다. 이전에 다른 이의 말의 아름다운 줄기를 보기 보다는 곁가지의 오류만을 보고 그것을 지적했다면, 이제는 진정 귀를 기울여 그들이 진짜로 말하고 싶어하는 ‘본질’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이들의 사소해 보이는 작은 오가는 말속에 그들의 인생과 깨달음이 옹기종기 모여있음을 보고, 그들이 발견한 진리에 나도 발을 담그고 싶어한다. 남을 낮은 곳에 두고 내려보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 두고 올려보려고 노력한다. 사소한 모든 것에서 소크라테스가 찾고 있는 진리를 나도 찾을 수 있도록, 온전하고도 사그라지지 않는 그 실재에 나도 다가가고자 애쓰고 있다.

그러므로 시간을 초월한 소크라테스가 아직 내 가슴 안에 이렇게 살아, 나를 움직이고 깨우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