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시간이란 종이에 쓰여진, 작가 자신이 주인공인 하나의 이야기라 해보자. 이야기를 적으려면 종이가 확보되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확보해야 하며 확보된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헌데, 그 효율의 기준은 무엇인가? 오늘날 효율의 기준은 단언컨데 '돈'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시간의 쓰임만이 가치있게 사용되었다고 평가 받고 그렇지 않았을때 시간을 낭비했다 한다. 돈의 시간은 하나의 도덕을 요구한다. '시간을 미래에 돈으로 환산 가능한 투자로서만 사용하라' 라는 도덕이다. 허나 우린 이 도덕을 완벽히 지킬 수 없기에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바쁘지 않을때, 잠시 고독이 맘 속에 자리할때 이 죄책감은 맘속에 더 깊이 침투한다. 그 죄책감을 잊기 위해선 돈으로 환산되지 않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 안된다. 자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버려야 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야하는 소중한 시간을 버리기 바쁘다. 스마트 폰이 오늘날 모든 사람들의 손에 들려있는 까닭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간을 확보하는 것과 동시에 우린 시간을 확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타인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타인역시 나의 시간을 빼앗아가는 주범이 아니던가? 허나 지금 이순간까지 명백히 살아있는 과거의 어느 시간의 장소에는 나와 타인이 반드시 함께 하고 있다. 시간을 타인과 나눌때 그 시간은 생명력을 가지며, 그 시간은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확장된다. -- 이 까닭이 무엇인지 저자는 논증하지 않는다. 또한 논증이 필요하지도 않다. 왜냐면 인간은 그리 생겨 먹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확보된 시간이란 종이에 어떤 이야기를 적어야 하는 것일까? 삶의 종국적인 목표란 지금 이순간에 논할 수 없는 것이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과정 뿐이다. 우린 이 과정이 올바르면 올바른 이야기가 쓰여지지 않을까 하고 바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올바른 과정이란 무엇일까? 이를 논하려면 삶이란 문학에서 작가와 독자와의 관계를 언급해야 한다. 작가는 글이 쓰여지는 매 순간마다 독자와 대화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다.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의 방향과 독자가 원하는 이야기의 방향은 많은 순간 다르기 마련이라 많은 순간 타협을 해야 하며, 가끔은 작가 스스로의 고집을 내쳐야 할때도 있으며 독자를 쫓아 내야 할 때도 있다. 이러한 결정을 하는 능력을 우린 지혜라 부른다.

이 지혜를 얻기 위해선 자신이 작성한 글을 투명한 눈으로 퇴고 해야 한다. 잘못된 문장은 고쳐 쓸 수 없지만 적어도 다음 이순간에는 같은 실수가 반복되는 것을 허락하면 안된다. 손가는 대로 이야기가 쓰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야기가 의도되지 않은채 멋대로 쓰여져 졸작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또한 더 나은 이야기를 적기 위해선 더 많은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자신의 삶뿐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훌륭한 이야기가 쓰여지길 바라는 것은 욕심일지도 모른다. 다만 삶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때 나와 나의 독자가 적어도 납득할만한 이야기가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