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는 말은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선언이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본질이 존재에 우선한다. 망치를 예로 들어보자.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한 도구로서 생겨났다. 이때 망치라는 존재는 '못을 박기 위한 도구' 라는 본질 또는 목적 이후에 오는 것이다. 때문에 망치의 경우 본질이 존재에 앞선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도구는 본질이 존재에 앞선다 할 수 있다. 그 도구들에는 본질이 있으며, 본질에 어긋나는 도구의 쓰임은 비극을 발생시킨다.

우린 태어나 인간답게 살아라, ~ 해야만 한다. 넌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등등의 말을 종종 들었다. 이런 모든 잠언들은 인간의 존재 이전의 본질을 전제하고 있는 잠언들이다. 이것은 목표와 표적이 정해진 삶이다. 이 경우 개개인 인간의 삶은 인간의 본질로 규정되어진 것을 재현하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실존주의는 이것에 반기를 든다. 그래서 (인간의)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고 말한 것이다.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고 했을때, 인간은 이미 주어진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즉, 이경우 인간은 인간의 본질을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 이것은 표적이 정해지지 않은 삶,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삶이다.

실존주의는 스스로의 본질을 스스로 규정하고 재현이 아닌 창조의 삶을 사는 개인을 주체라 명명한다. 실존주의 이전의 윤리학이나 종교가 인간에게 요구했던 것이 '성인'이라면 실존주의는 인간에게 주체로 서라고 명한다.

실존주의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허용 한다. 이것은 개인에게 도덕을 창조할 수 있는 권리를 준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과연 무한대의 자유이다. 그리고 실존주의 아래 사는 한 개인은 이 무한대의 자유와 함께 무한대의 책임감을 느낀다. 스스로의 행동은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선택으로 온 것이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주의는 윤리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윤리학적 특징이란 것이 '~을 금하는 것'에 대한 논의라 했을때 실존주의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 실존주의는 ~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존주의는 윤리학으로 동작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실존주의에 근거를 둔 윤리학이 가능하기는 할까? 어떤 사람이 살인을 했다 했을때 실존주의 아래에서 우린 그를 법으로 심판할 수는 있겠으나 그를 도덕적으로 욕할 수는 없다. 왜냐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자유 속에서 살인자는 다른 이를 살인하는 자유를 선택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진다고 했을때 실존주의자는 그를 도덕적으로 욕할 수 없을 것이다.

샤르트르는 이에 대한 응답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의 응답이 과연 재미 있다. 샤르트르의 응답은 이러 하다.

우리의 책임은 어느 사람이 상상할지도 모르는 그런 것보다는 훨씬 중대한 것이다. 왜나면 그것은 전인류를 앙가제 하기 때문이다.
... 나는 나 자신과 모든 사람에 대해서 책임이 있으며, 내가 선택하는 어떤 인간의 개념을 창조한다. 인간은 자신을 결정할 뿐 아니라 전 인류를 선택하는 입법자가 된다.

샤르트르는 무한한 자유를 허용하며, 그것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질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난 이렇게 선택의 결과로서 동반되는 책임의 무게감을 상기시키는 이 방법이 앞선 문제를 해결하는 그럴듯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오늘날 발생하는 커다란 범죄는 윤리와 도덕의 결핍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과잉에서 오기 때문이며, 또한 책임 전가에서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커다란 범죄의 기반은 어떤 신념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 신념은 스스로에서 온것이 아니라 외부의 명령 -종교, 또는 민족주의- 에서 온 것이다. 이런 범죄를 일으킨 범죄자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신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실존주의하에선 저렇게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난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사회가 올 수 있으리라 낙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