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지만 핵심 메시지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하라!'다. 저자의 의도는 뭘까?

완전한 독서의 모형을 떠올려 보자. 완전한 독서라 불리려면 독자는 왜곡이나 과장 없이 저자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해야 한다. 이것은 불가능 하다. 저자는 책으로만 저자의 의도를 말하기에 저자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했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을 뿐 아니라 저자도 자신이 쓴 책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그렇다고 한다)

또한 책의 일부분만 독자의 가슴을 쥔다. 헌데 그 일부분을 결정하는 건 책이 아닌 우리가 처한 환경이다. 이전에 읽은 책과 같은 책을 오늘 읽었을 때 감상이 다른 까닭은 '내'가 이전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독서란 책 뿐 아니라 독자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기에 시간을 초월한 완전한 독서란 불가능하다.

'완전한'이란 수식어 앞에는 언제나 '불가능'이란 단어가 자리한다. 불가능한 목표에 에너지를 끊임없이 쏟는 것은 낭비다. 그 힘을 다른 곳에 쏟을 필요가 있다.

우린 때때로 서평을 쓰거나 사람들 앞에서 책에 대한 의견을 표명해야 할 상황에 마주한다. 책에 대해 말하려면 그 책을 나름대로 해석 해야 한다. 해석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를 창조하는 행위다. 이름 높은 평론가들은 책을 온전히 이해해 높은 이름을 얻은 게 아니다. 그들이 재 창조한 이야기가 참신하고 훌륭할 뿐 아니라 현 시대에 유의미한 화두를 던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슬라보예 지젝은 영화를 보지 않고도 훌륭한 영화 평론을 남긴다.

창조는 '이해'를 목적으로 한 독서로 얻어지지 않는다. 바야르는 더 나아가 이해를 목적으로 한 독서는 창조에 방해가 된다고 말한다. 창조는 빈 부분을 채워 나갈 때 일어난다. 많은 이해는 빈 부분을 채우기에 창조가 일어날 가능성을 줄인다. 이 때문에 바야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과감히 말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책을 읽었어"라고 하는 것은 책을 '잃지 않은 책' 범주에서 '읽은 책' 범주로 옮겨 담았다는 말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바야르는 소유의 독서에서 존재의 독서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책을 완전히 이해하려는 강박 관념을 버려야 한단다. 음. 책을 지금 보다 덜 읽고 더 많이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중반까지는 꼼꼼히 읽다가, 어느 부분 이후로는 훑어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서평을 쓰고 있으니 난 바야르의 가르침을 바로 실천한 것이다. 바야르가 나를 보면 기뻐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