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과 슬픔으로 머리 속이 어질어질하다. 머릿속에 차분히 정리되었던 물음이 다시 고개를 들어 괴롭힌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아이러니와 도덕적 딜레마로 가득한 불투명한 회색지대라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 중 하나라고 한다면 이 소설은 그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이전에 블로그에 올린 바 있는 소설 "수난"과 한번 비교해 보자. 독자는 수난을 읽으며 어떤 인물이 '선'의 편에 있는지, '악'의 편에 있는지 쉽게 구분할 수 있고 그것으로 인물들에 대한 호불호가 완전히 갈리게 된다. 수난의 작가 카잔차스키는 우리가 "넌 지금 이 현실 속에서 어느 편에 있니?" 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원한다. 이 질문은 가슴을 괴롭히고 데운다. 데워진 가슴은 마지막 장을 덮는 즉시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되고, 나만은 이 세상에서 선의 편에 서야 한다고 굳은 결심을 하게 만든다. 당장 거리로 나가 짱돌을 들어 이 더러운 세상의 시스템에 집어 던지고 싶다. 그런데,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달랐다.

이 소설이 뻔할 것으로 생각했다. 아름다운 아프리카 부족의 풍경을 보여주겠지. 자연과 함께 숨 쉬며 공존하는 삶, 무언가를 파괴함으로써 얻는 뒤끝이 찝찝한 행복이 아닌 '진짜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 그런 삶과 풍경을 보여주겠지. 그러나 그 행복은 서방의 하얀 마귀들에게 짓밟히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확보하게 된 감정으로 그들을 좀 더 미워할 수 있게 되겠지.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작가는 아프리카 부족의 행복을 보여주지 않았다. 소설의 분위기는 서방의 하얀 마귀가 오기 한참 전인데도 어둡고 침침했다. 자신이 힘겹게 얻은 강자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 애쓰는 주인공 오콩코의 조급한 모습은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각개약진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으며 그의 성에 차지 않는 그의 아들 은워예의 모습은 마치 나 자신을 보는 듯 측은했다. 자연의 변덕과 예측 할 수 없는 삶의 모습들을 종교와 주술로 풀어나가는 모습들도 예쁘게 읽히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선과 거리가 멀었다. 유토피아의 아주 작은 일부라도 발견하고 싶은 내 욕심과 기대감은 충족되지 못했다. 쌍둥이가 태어난 것은 대지의 여신에 대한 모독이므로 내다 버려야 하는 사회, 다른 부족의 죗값으로 얻었던 이케메푸나, 어느새 오콩코의 아들이 되어주었으며 은워예의 형이 되어주었던 이케메푸나를 죽이라 명하는 숲과 동굴의 신이 지배하는 사회. 그리고 그 이케메푸나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버리는 주인공 오콩코. 내가 이것을 어떻게 예쁘게 봐줄 수 있단 말인가? 당혹스러웠다. 이건 내가 기대했던 풍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처럼 그 곳에도 전통이란 단어의 긍정적 이미지로 덮어버릴 수 없는 사회적 모순들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이 당연하게 변화와 진보를 갈망하듯이 그들도 그랬다. 그곳은 에덴이 아니었다. 인간이 자리를 차지한 땅에 에덴이 자리 잡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리고 침략자들은 이런 균열을 반가워하며 그들에게 살짝 문을 열어 더 나은 세계를 보인다.

백인 선교사가 그들의 종교를 들고 왔을 때 몇몇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를 반기며 선교사의 종교를 맞이했다. 고통을 참으며 아이를 낳았지만, 쌍둥이 이기에 버릴 수밖에 없었던 가련한 여인, '오수'라 불리는 하층민들이 백인의 종교에 흡수되었고….주인공 오콩코의 아들도 부족의 신을 버렸다. 부족의 지도자 중 한 명도 같은 길을 택했다.

부족은 그 종교와 공존을 원했으나 결국은 깨지고야 말 부대낌이었다. 그들은 몰랐다. 백인이 믿는 종교는 무한한 사랑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한편 배타적이고 폭력적이란 것을. 들어올 때는 사랑의 얼굴을 보이지만 자리를 잡으면 반대 얼굴을 보인다. 그때는 돌이킬 수 없다. 백인의 종교를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 그들의 신이 아닌 열강이란 것을 알아차린 그때는 이미 늦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드넓은 하늘을 날아본 독수리는 노동 없이 먹이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새장 안에서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들도 마찬가지다. 선교사들이 보여준 밝음을 본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한번 생긴 균열은 커져 가고 인간은 그것을 메울 수 없다.

카잔차스키의 '수난'은 묻는다. "질서의 수호인가 사랑과 정의인가?" 그때는 대답하기 쉬웠다. "수난"에서 혼돈의 여지는 없다. "질서의 수호"란 편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악하고 비열하다. 카잔차스키는 질서의 편에 선 자의 상황을 배려심 있게 쓰지 않았다. 이 책은 어떤가? "전통이냐 진보냐"라는 질문을 끄집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둘 다 빛이 있고 어둠이 있다. '전통' 이라고 말하기에는 그들의 무지로 희생당하는 쌍둥이 들이 마음에 걸리며 "진보"라 말하기엔 그들에게 진보의 메시지를 가르쳐주는 교회 뒤의 하얀 마귀들이 걸린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 다만 이 아프리카의 땅에 존재하는 개인으로서 슬퍼하고 운명의 신을 저주하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밖에. 부족의 전통 안에서 강자로 우뚝 서고 싶었던 오콩코는 그의 꿈을 펼칠 무대 자체가 사라지자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죽음과 그들을 함께 묶어 두었던 매듭에 백인이 쑤신 칼집이 들어가자 모든 것이 부서지는 광경을 보며 옳고 그름을 따지는 질문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전통이냐 진보냐" 이런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것은 사치이다. 다만 애도할 수 밖에. 그들을 이렇게 패배하게 했던 가혹한 운명의 땅과 시간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눈을 감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 글을 쓴 치누아 아체베는 기독교인이라 한다. 그가 기독교인의 교리를 받아들였다면 그는 나이지리아 기존의 신앙을 버린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는 이 소설을 쓰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의 땅에 지워진 이 가혹한 역사의 한 부분을 이렇게 가감 없이 보여준 그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이 소설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 눈물을 재료로 쓰인 책인 것이다.

그 눈물의 결실에 깊이 감사한다. 당신 덕에 가슴 저미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고맙다. 하지만 당신의 다음 책 '더 이상 평안은 없다' 는 읽지 않을 것이다. 가슴 저미는 감정은 족하다. 더는 알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