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쓴 대화를 하자고. 불가사의한 소년 - 소크라테스 편 글에서 나는 대화를 3가지로 분류한 후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옹호하며 대화가 자신을 남에게 강요하기 위한 도구, 이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기 위한 도구로서 이용되어야 한다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또한 대화의 숨어있는 동기의 근본이 "나"가 아니라 "진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난 나름대로(?) 그 원칙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이것을 늘 염두 해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늘 "넌 내게 관심이 없어, 넌 너 밖에 몰라"라는 소리를 꾸준히 들어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무엇이 잘못 된 것일까? 속으로 몇 번씩 되물어보아도 그 원인을 쉽사리 찾을 수 없었다. 그때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와 그 원인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고전 읽기 모임에서 알게 된 사람인데 현재 사람 투어 중이다. 그의 사람 투어는 고전 읽기 모임의 특정 사람들과 1:1로 만나 술을 사달라고 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첫 번째로 내가 선정되었고 그와의 첫번째 만남 가운데 난 엄청나게 혼났다.(처음 대화를 나누는 사람에게 이렇게 혼난 적은 처음이다.)
"사이(내 ID)님은 사이님밖에 몰라요. 적어도 당신은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만 남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어요"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닌 사람에게 이런 말들을 들으니 처음에는 어리둥절 했지만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곧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내 스스론 도달할 수 없는 새로운 결론에 이르게끔 친절히(?) 도와주었다.
진리를 찾기 위한 도구로 대화를 사용했을 때 대화의 참 목적은 소외된다.
이것이 그가 내게 알려준 내 대화방식의 문제점이었다. 난 대화를 통해서 나와 대화를 하는 상대방 그 자체를 알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소유하고 있는 어떠한 진리, 진실에만 관심이 있었다. 진리, 진실이라는 거창한 어휘를 빌리지 말자. 그것은 단지 지식적인 욕구에 불과했다. 난 내가 소유하고 있지 못하는 어떠한 지식을 남을 통해 알고자 노력했고 그것으로 나 자신을 발전시키려고 했다. 결국 그것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었다. 상대를 향해 있어야 하는 내 귀기울임의 방향이 나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나와 대화하는 상대는 어느 순간 알게 된다. 내가 말하는 자신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물론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는 열심히 ‘말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대화가 '진리'라는 거창한 제 3의 요인에 의해 그것의 본래 목적이 소외된 것이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내가 나 밖에 모른다는 것"의 의미 인 것이다.
이봐, 대화의 참 목적은 관계맺기 에 있다고.
그는 그것이 대화의 목적이라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대화란 본래 목적은 ‘나’를 충분히 표현하고 ‘너‘를 충분히 알기 위한 도구였다. 그는 이것의 가치를 문자나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짬을 내 사람들을 1:1로 만나는 것으로 자신의 삶이 풍요로워지는 광경을 보여주었고 또한 그는 내게 먼저 만남을 청함으로써 그 풍요의 일부분을 내게도 나누어 주었다. 감사한 일이다.
2010 5월에 썼던 이 미완성의 글을 완성시키지 않은 채 올린다. 아래는 오늘 읽은 “대화의 기술”이란 글 중 일부이다. 좋은 글이다.
이쯤 되면 ‘윤대녕풍 대화’가 떠오른다.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문학동네·2010)의 한 장면. 남자는 지금 여인의 가슴 쪽으로 손을 옮겨가는 중이다.
"거기서부터는 국경이에요. 지금 국경을 넘지 못하면 뒤쫓아온 수비대에 끌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박달나무 기둥에 묶여 총살을 당하게 될 겁니다."
"조국을 등지고 목하 어디로 망명 중인데요?"
"왜, 아실 텐데요. 오늘 밤은 당신이 내 조국이잖습니까."(66쪽)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은 킥킥거린다. 결국 ‘좋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소’와 ‘싫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을래요’로 요약되는 성인남녀의 ‘수작’들이 어쩐지 귀엽고 애틋하고 쓸쓸하다면 그것은 윤대녕의 소설이다.
어린 독자들에게는 어쩌면 ‘느끼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이런 대화를 나는 좋아한다. 어른들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진심이라 믿은 욕망도 세월 속에서 허망하게 스러지기 일쑤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면 자기 자신에게 쉽게 속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들은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도 말에 무게를 싣지 않고 가볍게 띄운다. 그런 말의 가벼움은, 그저 객기에 휩쓸려 마구 늘어놓는 말의 가벼움과는 다르다. 요컨대 대화란 탁구 치듯 주거니 받거니 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는 두 사람의 겉옷이나 손등이 계속 스치는 것처럼 쓰는 것이다. 좋은 대화는 ‘정보’의 교환이 아니라 ‘조짐’의 형성이다